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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살로메, 사랑 끝에 서다(김대유 교수 연재 시리즈 -높고 쓸쓸한 영혼 여류작가들 이야기-)

지금이순간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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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쓸쓸한 영혼 여류작가들 이야기] ④루 살로메, 사랑 끝에 서다


고통과 고독이 만나면 무엇이 나올까? 물빛 그리움이 나오지 않을까?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가슴에 깃든, 그러나 무엇보다 2등 인류로 살았던 여성들의 그리움은 무슨 빛깔이었을까? 숙명 같은 여성의 삶을 딛고 시대의 아픔과 그리움을 독하게 써 내려간 여성작가들의 예술혼 앞에서 문득 숙연해지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차별의 금기로 얼룩진 여성 잔혹사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되었던 그녀 자신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꺼지지 않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그 배경과 시대정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치유의 길을 여는 일이다. 언제든 그녀들을 만나는 일은 또한 미래를 여는 마음의 열쇠로 각인되는 일이다. 지난해 본지 교육플러스에 ‘성과 사랑’ 시리즈를 연재하여 단행본 「성, 사랑의 길 –인문학과 성의 만남-」을 출간했던 김대유 교수가 이번에는 역사 속 그리움으로 만나는 ‘여류작가 15인 편’을 연재한다. 김대유 교육학 박사는 경기대에 이어 서영대에서 강의하고 있고,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위원과 국가인권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NAVER 베스트셀러인 「행복한 삶의 온도」를 비롯해 15권의 저서를 집필한 바 있다.<편집자 주>

루 살로메.(사진=나무위키)
루 살로메.(사진=나무위키)

은밀한 설렘 ‘루 살로메’

물빛 안개비가 문득 가슴을 적실 때…, 가끔 은밀한 설렘이 메마른 가슴을 노크할 때, 먼 곳으로부터 대책 없이 다가오는 이름들은 마리아, 사임당, 퀴리, 링컨, 세종대왕 그런 이름들이 아니다. 낭만의 자유인 황진이, 에비타의 주인공 에바 페론,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 짧은 만남 긴 여운의 마릴린 먼로, 헤어질 결심의 탕웨이, 현빈, 이도현, 차은우…, 그런 이름들이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는 설렘의 이름이며 아득한 이름이다. 천재 남자들을 사랑에 빠트리고 절망에 이르게 한 여인이며 유럽과 러시아를 오가며 문학의 실크로드를 만들어 낸 사람이다. 그녀는 은밀한 러브스토리의 생산자이자 지독한 팜므파탈의 대명사로 19세기 말에 유럽 문학판을 뒤흔든 ‘세기의 여류 문학가’이다. 하필이면 이름이 살로메, 성경 속의 헤롯왕을 요염한 관능의 춤으로 유혹하여 세례자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오게 한 처녀 살로메와 동명이다. 이 때문에 루 살로메를 전혀 모르거나 잘 알지 못하는 이들도 루 살로메의 이름에 자못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어떤 느낌(?)의 친숙함인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말이다. 

루 살로메는 36세에 22세의 릴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릴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꼈으며 예뻐했다. 살로메는 프랑스식 본명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세프 마리아 릴케’의 이름을 독일식 이름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바꿔주었다. 살로메를 상대로 끝내 청혼도 사랑도 충만하게 이루지 못한 릴케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도 임종 직전에 “내가 어떤 점이 부족하여 루 살로메의 사랑을 충족시키지 못했는가”를 한탄하며 의문스러워했다. 그러나 릴케는 살아생전 루 살로메에게 후세에 길이 남을 사랑의 시를 헌사했다.

《내 눈을 감기세요》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나는 당신을 내 가슴으로 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럼 나의 뇌가 심장으로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머리에 불을 지르면

그때는 당신을 내 핏속에 실어 나르렵니다. ”(릴케)

루 살로메(이하 살로메)는 소설가, 저널리스트, 수필가, 정신분석학자로 살면서도 평생 스캔들의 한가운데 놓여있었다. 그녀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와 스승이자 친구 사이로 교제를 나누었고, 꿈의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과 지성을 공유했으며, “신은 죽었다”를 외치며 현대철학의 문을 연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에게 지독한 구애를 받았다. 특별히 낭만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뜨겁고 시끄러운 러브스토리를 남겼다.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은 한결같이 살로메에게 연애의 주도권을 빼앗겼고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누구일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사진=위키백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사진=위키백과)

살로메의 작은방, '연금'

그렇게 유명하고 떠들썩한 살로메였지만 평생 그녀의 수입원은 1914년, 53세까지 러시아의 황제에게 매년 받은 유족연금이 거의 전부였다. 40여 년을 함께 살았던 남편 안드레아스와 검소한 생활을 영위했고, 그와 하녀 사이에 태어난 딸을 양녀로 입양하여 키웠던 평범한 시민이었다. 살로메는 적은 돈이었지만 러시아의 군대 장교였던 아버지가 남겨준 황제 차르의 연금이 있어서 남자들에게 경제를 의존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1889년 비스마르크가 독일에서 노령연금법을 시행하기 전에 이미 제정 러시아는 국가유공자 등에게 지급하는 연금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살로메가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독일에 정착했지만 제정 러시아가 망하기 전까지 연금을 지급하고 있었으니,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라울 따름이다.

차르의 연금은 소박하지만, 평생 살로메가 당당한 자립의 길을 걷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당시에 ‘2등 인류 여성’의 삶은 비참했다. 러시아나 유럽의 여성들은 부모나 남편에게 경제생활을 의존했고, 영국에서는 아내를 내다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심지어 마녀사냥도 잔존했다. 러시아와 유럽의 대학들은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서 공부의 길도 막혀있었다.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버지니아 울프도 귀족 가문의 딸이었지만 대학 진학의 길이 막혀 겨우 왕립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정도였다. 그나마 스위스의 대학 중 일부가 여성의 진학을 허용했다. 살로메는 얼마 되지 않은 유족연금을 손에 쥐고 스위스의 취리히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졸업한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역시 남녀 모두 수학할 수 있는 학교였으니 19세기의 스위스는 명실공히 개방적인 학문의 전당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모교에서 클래스메이트인 밀레바와 캠퍼스 커플(CC)로서 열렬히 사랑했고 졸업 후 결혼까지 하였다. 지금 돌아보면 어쨌든 동시대에 살로메와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만 하다.

살로메 생애에서 연금 문제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그녀는 연금 덕분에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유지했으며 연애와 결혼, 사교생활, 문필활동에서 누구의 신세를 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고 연금은 끊겼다. 먹고사는 문제가 목전에 다가왔다. 대학교수였던 남편 안드레아스도 그 무렵 실직을 하여 백수가 되었다. 난생처음 생계 문제에 직면한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했다.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과 전문의로 하루에 열 명이 넘는 환자를 상담해야만 했고 일각에서 돈벌이용이라고 눈총을 주었던 문필작업에 뛰어들었다. 「소년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 「집」, 「하얀 길 위의 릴케」,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감사」 등 일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 이 연금 상실의 시기에 집필되었다. 특히 릴케와 프로이트에 관한 책은 본인의 자서전이나 다름이 없어서, 현재까지 살로메에 대한 논저나 인터넷 소개 글이 이 저서들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연금은 버지니아 울프가 “여자가 500달러의 돈이 있으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했던 바로 그런, ‘그녀의 작은방’이었던 셈이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캠퍼스 모습.(사진=채널예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캠퍼스 모습.(사진=채널예스)

자유로운 영혼 글로벌한 지성

살로메의 본명은 루이자 살로메로 1861년 상트페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0대를 보냈다. 그녀는 제정 러시아의 고급장교인 아버지 구스타프 폰 살로메의 외동딸로 다섯 명의 오빠들에 둘러싸여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살았다. 우스개 얘기지만 살로메의 심리분석을 진행했던 프로이트는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살로메는 외동딸로 다섯 명 오빠들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자라는 과정에서 고집이 세졌고, 오빠들과 사랑을 공유하면서 후일 남성들과 1:1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천재로 자라나던 살로메는 17세에 이르러 명망이 높았던 사교계의 귀족 목사 길로트를 만나 신학과 철학, 논리학, 불문학, 독문학 등을 배웠다. 42세의 길로트 목사는 천재성이 뛰어난 소녀 살로메에게 빠져들었다. 둘의 관계는 스승이자 연인으로 발전했고, 목사는 마침내 부인과 이혼한 후 살로메와 결혼하려는 욕망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살로메는 길로트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스위스로 건너가 취리히 대학 철학부에 입학한다.

가끔 인생의 위기는 기회를 낳게 마련이다. 그녀는 대학에서 당대의 뛰어난 신학자 비도만 교수에게 수학하며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교수들의 총애를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폐병이 도지면서 건강 문제가 심각해지자,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 나라 이탈리아로 건너간다. 살로메는 여기에서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던 ‘말미다’(귀족 폰 마이젠부르크 부인)와 만나게 된다. 늘 그렇듯이 인생의 길은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살로메의 사회생활은 말미다 부인에게서 시작하여 글로벌의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살로메는 말미다 부인의 소개로 철학자 파울 레를 만났고, 이어 바젤 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였던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와 조우했다. 38세의 니체는 파울 레가 살로메에게 구애했던 것처럼 21세의 여대생인 그녀에게 뜨거운 애정 고백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태어나 왜 만나게 되었나?”

그러나 애타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사랑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을뿐더러 살로메의 기묘한 제안(철학적 공론을 위한 동거)에 오히려 셋이 함께 동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다. 질투심에 불탄 니체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니체는 그녀를 떠난 후 애증의 분노심에 불타서 그 마음을 투영한 작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저술했다. 살로메는 니체의 집착어린 사랑을 외면했지만, 그 자신 비평가로서 니체에 대해 예지적인 평론을 한 바가 있다.

“우리는 미래에 니체가 새로운 철학적 종교의 예언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수많은 영웅들을 추종자로 두게 될 것이다”

살로메의 평론대로 후에 니체는 헤겔과 쇼펜하우어를 뒤흔드는 초현실주의 철학자로 등극하였으니, 우리는 평론가로서 살로메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그녀는 베를린 대학의 언어학과 교수인 안드레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그와 42년간 법적인 부부로 살았다. 살로메를 짝사랑했던 안드레아스는 자살 소동을 벌이면서 구혼을 했고 공포에 질린 그녀는 엉겁결에 청혼을 수락했다. 오늘날로 치면 데이트 폭력(dating violence)이다. 그런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전제조건이 있었다.

“결혼생활 중에 성생활은 금지, 자유로운 연애에 참견하지 말기”

(사진=조선일보 캡처)
(사진=조선일보 캡처)

안드레아스는 (고통스럽게)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한번은 모르는 척 조건을 어기려고 시도하다가 살로메에게 실제로 살해당할 뻔한 후로는 평생 약속대로 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자업자득이었던 셈이다. 그 후로도 니체의 그림자는 길게 이어졌다. 니체는 살로메에게 상처를 입은 후 폐인처럼 살면서 역작들을 생산했다. 그녀는 니체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그에 대한 평론집 「작품으로 본 니체」를 저술하였고, 이 책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니체 연구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자료의 하나로 쓰이고 있다. 파울 레는 니체가 죽은 지 1년 만에 살로메와 사랑의 추억이 깃든 스위스 칠레리나 산 위에 올라 투신자살을 하였다. 한 사람은 미쳐서 죽고 한 사람은 자살하였으니 참 사랑의 기묘한 관계다.

마침내 36세의 살로메가 22세의 젊은 시인 릴케를 만나 처음으로 성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살로메는 남편 안드레아스가 있었고 릴케는 애인 프리드리히 피넬리스(신경정신과 의사)가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안드레아스와 셋이 함께 러시아 여행길에 오른다. 살로메는 레프 톨스토이(1828~1910)에게 릴케를 소개했고, 장엄한 ‘성(聖) 톨스토이’의 존재감에 사로잡힌 릴케는 ‘민중(民衆)’이라는 존재에 눈을 뜨게 된다. 릴케의 시문학은 톨스토이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이후 조각가 로댕과 일하며 예술의 세계에 깊이 천착하게 되었다. 릴케는 살로메와 둘이서만 동행했던 두 번째의 러시아 여행에서 「부활」의 삽화를 그린 화가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와 그의 아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만나게 된다. 소년 파스테르나크는 릴케의 문학을 경청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후에 불후의 명작 「닥터 지바고」를 집필해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릴케와 살로메는 이별한 후에도 평생 문학의 동지이자 친구로 지냈으니, 사랑과 우정은 종이 한 장 차이인가? 정녕 모르겠다.

살로메는 늦은 50세에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스승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연구와 진료에 몰두했다. 힘들지만 행복한 시기였다. 프로이트는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

“내가 정신분석의 산문가(散文家)라고 한다면, 살로메는 정신분석의 시인(詩人)이다”

그녀는 프로이트와 일하며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인정받았지만, 그림자도 따랐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타우스크’ 박사의 열렬한 구애를 차갑게 거절했고, 상심에 빠진 타우스크는 스스로 거세(去勢)한 후 자살했다.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만남 중에 프로이트는 그녀에게 연인 이상으로 특별한 존재였다. 그만이 애정의 도가니에 빠지지 않고 살로메와 끝까지 우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살로메는 죽기 직전에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감사’라는 저서를 집필하여 그에게 헌사하여 고마움을 표했다. 이 책은 역시 프로이트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살로메는 평생 소박하게 살았다. 남편 안드레아스는 1891년에 일찍이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교수직을 잃었고 193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긴 세월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그녀는 당뇨병과 유방암을 앓다가 1937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리고 독일의 문학사에 ‘루 살로메’라는 선명한 이름을 남겼다.

(사진=경인일보 캡처)
(사진=경인일보 캡처)

한 아름 자기다움의 아름다운 그녀

루 살로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첫째, 세기적인 지성인이었다. 그녀는 15권의 저서, 다수의 논문과 칼럼을 남긴 철학자이자 문필가였고 대단한 저널리스트였다. 러시아와 독일,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오가며 유럽의 문단에 큰 족적을 남겼다.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니체, 프로이트, 릴케, 카를 융 등 당대의 지식인들과 나란히 교류하면서 위상을 굳혔다.

둘째, 주체적인 여성의 삶을 스스로 쌓아 올렸다. 마녀사냥이 남아있던 19세기에 우정과 연애, 결혼에 대한 소신을 드러냈고 뜻한 바대로 살았다.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은 홀로 우뚝한 그녀의 개방성과 지성 앞에서 우주의 다른 생명체를 만나듯 감전되어 버렸다. 애절한 구애와 짝사랑, 폴리아모리(Polyamory) 속에서 무너진 것은 남성들이었다. 그 때문에 평가절하되었고 나아가 팜므파탈의 화신으로 억울하게 낙인찍히기도 했지만,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았으니 참으로 멋진 일이다.

셋째, 일과 사랑을 구분할 줄 아는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니체와 릴케, 프로이트와 교제하면서 애증에 끌려가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포함하여 릴케, 니체, 프로이트에 대한 평전을 서술함으로써 대중을 상대로 솔직하게 관계를 밝혔고, 그에 관한 글들은 후세에 귀중한 연구자료로 남겨졌다. 살로메와 같은 문필가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다고 할 정도로 드문 사례이다. 19세기 근대의 여명이 밝아오는 시기에 루 살로메와 같은 주체적인 여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놀랍고 유쾌한 일이다. 나 자신 역시 그녀에 대한 작은 글을 쓰게 되어 영광이다.

“루 살로메는 한 아름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녀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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